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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혼선생묘 < 경기도기념물 제59호>
작성자 관리자 [2021-01-22 17: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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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혼 선생 묘 소재지 : 파주시 파주읍 성현로 60-16>

1598년(선조 31년) 6월 6일, 성혼은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혼의 장례는 3개월 장을 치러 8월 19일에 파주 향양리에 있는 아버지 성수침 묘 뒤에 동향으로 안장되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寗)이며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黙庵) · 우계(牛溪)이다. 현감 수침(守琛)의 아들로 서울 순화방(順和坊:지금의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551(명종 6)에 생원 · 진사의 양장() 초시에는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해 겨울에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1568(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8(선조 1)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暑參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 · 장원서장원(장원서장원) · 적성현감(積城縣監)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그는 서실의(書室儀)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하였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선조 5)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일찍이 이황을 사숙하였으나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에 회의를 품고 있었는데, 중용()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하면서 서신을 주고 받았다. 15732월에 공조좌랑에, 7월에 장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아니하였고, 그해 12월에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이이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 사임하였다. 15756월에 다시 지평으로 불러 상경하였으나 병으로 사체(辭遞)하니 선조는 의원을 보내어 약을 지어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공조좌랑 · 지평 등을 제수하였으나 사임하고 본가로 돌아가니 선조는 그의 체임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지평 · 예빈시판관 · 장흥고주부 · 장령 ·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계속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1(선조 14) 정월에는 종묘령(종묘령)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을 허가받지 못하였다. 그해 2월에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하여 진달하였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해 3월에는 장령에서 내섬사첨정(內贍寺僉正)으로 전직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이어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법(役法)과 공법(貢法)의 민폐를 논하고 경장(更張)을 역설하되 혁폐도감(革弊都監)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귀향이 허가된 것도 아니었다. 녹봉을 거부하면 미숙(米菽)을 하사하면서 귀향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어 내섬시첨정 · 풍저창수(豊儲倉守)를 역임하면서 선정전(宣政殿)에 등대하였으며,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뒤 전설사수(典設司守) · 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다. 그는 경연석상에서나 상소로 계속 퇴구(退歸)를 청하였지만 도리어 겨울용 신탄(薪炭)을 명급하고 용양위상호군(龍讓衛上護軍)에 승배(陞拜)되었다. 그해 연말에 선조의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선조 15)에는 다시 집의(執義) · 사옹원정(司壅院正) · 사재감정(司宰監正)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니, 그 이듬해에 특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 이어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이러한 그의 관계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이가 죽자 사귀(辭歸)를 청하였으나 허여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으며, 그해 7월에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纂集廳堂上)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를 하였고, 15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툰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선조 22)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하였는데,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하자 동인의 화살이 그에게 집중되었지만, 사실은 그는 정철(鄭澈)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1590(선조 23)에는 양민(養民) · 보방(保邦) · 율탐(律貪) · 진현(進賢)의 방도를 논하는 장문의 봉사소(封事疏)를 올리고 귀향하였으며, 1591년에 율곡집(栗谷集)을 평정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그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 · 이천(伊川) · 연천(連川) · 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다가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하면서 불러 전삭녕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으며,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그가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그를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그는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편의시무 9(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 · 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 · 영유(永柔)와 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하였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유호(留扈)하였다. 1594(선조 27)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 · 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 14를 올렸으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군대를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그는 영의정 유성룡(柳宬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고, 또 허화완병(許和緩兵)을 건의한 이정암(李廷)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그는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그길로 사직하여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선조 27) 2월에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 · 정사조(鄭士朝)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하였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견(嚴譴)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는 우계집66책과 주문지걸(朱門旨訣)11, 위학지방(僞學之方)1책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602(선조 35)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인조 11)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되었다가 1694(숙종 20)에 다시 승무(陞無)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蕓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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