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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계(牛溪) 성혼(成渾) - 우계문화재단 자문위원 장상록
작성자 관리자 [2020-12-28 13: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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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牛溪) 성혼(成渾)

우계문화재단 자문위원 장상록

 

 

우계(牛溪) 성혼(成渾)은 중종(中宗) 30년인 1535년 태어나 임진왜란이 진행 중이던 선조(宣祖) 31년인 159864세로 삶을 마감했다. 자는 호원(浩原)이고 호는 우계(牛溪) 묵암(墨庵)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증조부는 현령 성충달(成忠達), 조부는 지중추부사 성세순(成世純), 부친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이다. 모친은 판관 윤사원(尹士元)의 딸 파평 윤씨이다.

 

우계의 평생 친구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이 어머니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이었다면 우계에게 있어서는 부친인 성수침의 삶이 곧 우계의 일생을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수침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상적 인물상인 기묘명현으로 조광조 문하에 있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조차 존경을 표하는 인물이었다.

 

우계와 관련 특이한 것 중 하나는 그의 친우관계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송강(松江) 정철(鄭澈),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등과 깊이 교유하였는데 친구인 율곡과 구봉이 그렇듯 우계라는 그의 호도 파주의 지명에서 유래했다. 당시 선비들은 그를 '우계선생'이라 불렀다.

 

우계는 평생 벼슬을 멀리한 지식인이었다. 1551년 생원과 진사 초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신병으로 대과(大科)를 포기한다. 이후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식과 덕행을 인정받는다. 1554년 율곡을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고 1568년에는 퇴계(退溪)를 만난 후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선조 1년인 1568년 경기도 관찰사 윤현(尹炫)에 의해 학행으로 천거되어 전생서 참봉에 임명된 이후 69번이나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그가 관직에 나간 것은 7번뿐으로 기간으로는 채 1년이 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우계서실을 건립하고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함으로써 이후 조선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의 제자인 중봉(重峯) 조헌(趙憲),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등은 후일 모두 문묘에 배향되었을 뿐 아니라 영의정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고위 관료도 배출했다.

 

우계가 활동하던 시기는 붕당이 출현하던 바로 그 시기였다. 우계도 그 여파를 피할 수 없었는데 당파적 공격을 받아 탄핵받는 일이 생긴다.

제일 먼저 문제가 된 것은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당시 그의 역할과 관련된 것이었다.

가장 큰 비판은 북인(北人)의 영수인 최영경(崔永慶)의 죽음과 관련 된 것 이었다.

하지만 우계는 동인(東人)들 비판과는 달리 최영경의 구명을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중종(中宗)이 기획한 친위 쿠테타였듯이 기축옥사도 가장 큰 책임은 국왕인 선조에게 있었지만 그 책임은 오롯이 정철과 성혼에게 돌아온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송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우계가 처했던 당시 상황을 간과한 무리한 비판이었다. 그것은 우계가 아닌 그 누구였어도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우계에 대한 마지막 비판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결정타는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이 화의를 주장하는 장계를 올렸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삼사의 공격을 받고 파주로 낙향하게 된다. 하지만 이 또한 당시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대응책이었다.

 

우계는 퇴계에 대한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율곡과는 우율논변(牛栗論辨)을 통해 주자(朱子)의 인심도심(人心道心)설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한다. 당시 30대였던 두 성현은 15729차례에 걸쳐 편지를 통해 사단칠정이기설(四端七情理氣說)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현재 우리 모습을 보면서 두 성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계는 죽은 후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동인들의 탄핵에 의해 삭탈관직 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후인 1633년 복관사제(復官賜祭)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숙종(肅宗) 7년인 1681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후 남인(南人) 집권기인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의해 1689년 출향되었다가 서인(西人) 재집권한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1694년에 다시 복향(復享)되었다.

 

우계는 학문적으로는 조광조와 부친 성수침의 학문 경향을 계승하면서 퇴계와 율곡의 학문을 절충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우계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는 퇴계에게 자문을 구했고 율곡이 이탕개(尼湯介)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대파로부터 공격 받을 땐 앞장 서 율곡을 변호했다. 사후 그의 학통은 외손자인 윤선거(尹宣擧)와 외증손자 윤증(尹拯)을 통해 소론(少論)의 사상적 원류가 된다.

또한 양명학과 무실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끼침으로써 노론(老論)이 주류가 된 조선사회에서 그는 정파를 초월한 원로로 남게 된 것이다.

 

우계 성혼은 조선의 정신사는 물론 현실 정치를 이끌어가는 성현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우계가 남긴 궤적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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